Story of Art
반려 : 함께 그리는 동심원
예술가를 만든 어떤 가족 이야기
로맹 가리와 어머니가 나눈 ‘새벽의 약속’
고흐에게 동생 테오가 없었다면?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언니 매지가 없었다면? 스티븐 킹에게 아내 태비사가 없었다면? 예술가들이 그들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었던 건, 이름이 가려진 조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편의 소설로 남은 예술가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소개한다.
최동민(<작가를 짓다> 저자)
‘니나 카체프’의 삶
여기 한 여자가 있습니다. 빼어난 목소리와 외모로 배우가 되고자 했던 그는 집을 나와 유랑 극단에 들어서죠. 그리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두 사람은 아이를 갖게 되었지만, 남자는 여자를 떠났습니다. 결국 여자는 홀로 아이를 낳아 키워야 했죠.
이것은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받은 작가 로맹 가리와 그의 어머니 니나 카체프의 이야기입니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을 쓴 로맹 가리. 그는 흔히 프랑스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곳을 묻는다면 프랑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찾아야 합니다. 러시아. 그곳이 로맹 가리의 고향이었죠.
더 나은 삶을 위한 희생의 여정
니나는 러시아가 싫었습니다. 자신과 아들을 두고 간 남자의 나라여서 싫었고, 자신의 삶을 무너뜨린 잔인함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줄곧 세상에서 가장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믿었던 프랑스의 시민이 되는 모습을 꿈꿨습니다. 그리고 그 꿈 앞에는 아들 로맹 가리가 있었습니다. 니나는 아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싶었고, 아들이 프랑스 사교계에서 춤을 추길 원했고, 프랑스 대사가 되길 원했으며, 빅토르 위고 같은 대문호가 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니나는 움직였습니다. 프랑스로! 프랑스로!
하지만 유대인 출신의 가난한 러시아인이 단번에 프랑스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눈 쌓인 끝없는 길을 걷는 것. 가끔 기차를 타는 것. 그리고 자주 국경을 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니나는 러시아를, 우크라이나를, 폴란드를 넘었습니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그녀는 돈 벌 일을 찾아 나서야 했고, 장사부터 청소, 담배를 마는 일까지 마다 않으며 아들 로맹 가리를 지켰습니다. 하루에 한걸음씩, 프랑스로 향하는 그 걸음은 몹시도 지난했습니다. 커가는 로맹 가리와 달리 니나는 나이를 먹었고, 건강은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니나는 하나뿐인 낡은 코트 주머니에 “나는 당뇨환자 입니다. 제가 쓰러져있거든 이 설탕을 먹여주세요.”라는 쪽지를 달고 다녔습니다. 또한 그런 몸을 하고도 프랑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 땅에만 닿으면 아들에게 선물할 우아한 삶이 시작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죠.
니스의 찬란한 빛
두 사람은 마침내 지중해 연안의 프랑스 도시, 니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살던 러시아와 니스는 같은 지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기후가 다릅니다. 러시아의 혹한과 달리, 니스의 햇볕은 길고 따뜻했습니다. 그래서 찬란했습니다.
프랑스는 두 사람에게 웰컴 드링크라도 제공한다는 듯, 친절한 안내인을 선물했습니다. 바다와 산이라는 뜻의 ‘메르몽 호텔’을 운영하던 그는 니나에게 호텔 관리를 맡겼고, 두 사람은 멀쩡한 지붕과 생채기 나지 않은 벽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니나는 항상 니스의 어느 시장에서 장을 보거나 일을 했는데, 기다리던 아들의 작품이 당선됐다는 소식에 시장 한가운데서 예의 그 좋은 목소리로 작품을 낭독했습니다. 시장 사람들은 읽어주는 글이 뭔지도 모른 채, 기쁨에 찬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맹 가리의 첫 독자가 되어주었죠.
어머니가 꿈꾸고 예언했던 모습이 되었을 때
이후 로맹 가리는 니스를 떠나 대학으로, 이후에는 세계대전 속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되어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전투를 이어갔습니다. 그런 이유로 한동안 니스로 돌아오지 못했는데요. 그가 돌아온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이후였습니다.
로맹 가리는 전쟁이 끝나자 사랑하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니스로 향했습니다. 어머니는 그간 전장의 아들을 응원하기 위해 몇 백통의 편지를 보내오곤 했었죠. 이제 로맹이 그 정성을 갚을 차례였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이었을까요? 시장에 당당히 서서 로맹을 맞아줄 것 같았던 어머니가 없었습니다. 대신 남아있는 것은 로맹 가리가 떠난 뒤, 병원에 입원한 채, 아들을 그리워하며 쓴 니나의 노트 몇 권이 전부였죠.
그랬습니다. 니나는 전쟁에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 훈장을 받고,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 그 모든 것을 다 기다리지 못한 채 지병이 악화되어 먼저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것도 전쟁이 끝나기 2년이나 앞서서 말이죠.
“넌 외교관이 될 거고, 프랑스 대사가 될 거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거야.”
로맹 가리는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 중 엄마가 보내 준 편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배려였습니다. 니나는 아들에게 자신의 소식이 전해지면 마음이 무너질까 두려워 미리 편지를 써두고 주기적으로 편지를 부쳐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로맹 가리는 끝까지 자신을 품에 안고 세상에서 지켜낸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니나가 사랑한 백합 한 다발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리고 <유럽의 교육>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지어진 한 권의 책을 들고 니스의 코카드 묘지로 향했습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로맹과 함께 길을 걷는 것은 이제 당신의 자유에 맡기려 합니다. 로맹과 함께 그곳에서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을 만나 봐도 좋고, 그에게 어머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을 선물해 주셔도 좋습니다. 그 길이 끝나고 다시 니스의 바다에 서면 저는 한 권의 책을 들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로맹 가리가 어머니와 자신의 이야기를 쓴 소설. <새벽의 약속>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