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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인으로 살기
VS 만화가로 살기

오영진 UAE 원자력본부 공사기술실

만화소년, 한전에 입사하다

“남자가 미대 가서 뭐할라고… 공대 가라”
아버지의 이 말에 미대를 생각했지만 공대로 진로를 바꾸었다. 미술과 관련 있겠다 싶어 입학한 건축공학과는 내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고, 방황하던 차에 선배의 권유로 만화동아리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만화의 매력에 빠져지내던 나는 동아리를 벗어나 만화적 코드가 비슷한 또래들과 언더그라운드 만화 집단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기존 상업만화, 일본망가 하고는 결이 다른 우리만의 독립만화를 추구하고자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드디어 나는 아버지께 '졸업 후 만화가가 될거라고...' 선언했다. 그때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그리 녹록질 않았다. 상업성이 전혀 없는 무명작가의 작품을 받아 주는 출판사는 단 한 군데도 없었고 결국, 이듬해 여름 나는 한전에 입사하게 되었다.

직장인과 만화가의 경계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만화책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고 나만 바라보는 아내와 아이들까지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크고 손이 덜 갈 때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 일상에서 하루 한두 시간은 젊은 시절 그토록 좋아했던 만화에 투자하기로 했다. ‘퇴근해서 골프를 치든 기타를 배우든 다 각자 취미생활인데 그 시간을 만화로 해보자. 하루 1페이지를 그리면 1년이면 책 한 권이 만들어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직장인과 만화가 생활을 경험하면서 느낀 장점이라면, 이 두 영역은 완전 다른 세계였고, 나는 이를 오가며 사고의 확장과 유연함을 배웠다. 가끔 만화 그리는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에 가서 만화 속 비행기 전투 신을 주제로 서로 열변을 토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자면 속이 후련해진다. 늘 상사나 업무 이야기를 술자리 안주 삼아 하던 직장인들 대화하고는 달리 얘들은 너무 재밌다.

한전의 리얼리티 담은 르포형식의 만화

한전은 내게 참 고마운 곳이다. 건축업무를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있다. 북한 경수로 사업으로 만난 북한 주민들, 도서전화사업을 위해 만난 섬 사람들, 사옥건설 감독으로 땅끝마을에서 보냈던 시간, 송변전 건설 현장에서 만났던 수많은 민원인들, 그리고 지금 UAE 바라카 원전까지, 일반 직장인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이 모든 경험과 그 속에서 만났던 다양한 인간군상이 내 만화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나의 만화를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르포형식의 만화라고 한다. 이런 독특한 만화 문법이 인정받아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알려져 출간의 기회와 함께 만화상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남쪽손님(해외판)

수상한연립주택(해외판)

새대가리

누가내머리에 똥쌌냐(해외판) Adulteland(해외판)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만화를 꿈꾸며

일러스트 풍경

웹툰의 인기로 만화를 그려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흔히 만화가는 그림을 잘 그려야 된다고 착각을 한다. 하지만 만화는 그림, 연출, 시나리오 이 세 가지가 잘 어우러져야 좋은 만화가 된다. 만화와 가장 비슷한 장르는 영화이다. 만화를 그려보길 원한다면 그림일기 쓰듯 시작해 보길 권한다. 자신의 하루일과 중 기억에 남는 것을 3~6컷 정도로 구성해서 꾸준히 그리다 보면 자기만의 색깔 있는 그림체가 확립되고 연출력이 느는 게 느껴질 것이다. 또 하나는 영화, 연극, 소설 등을 많이 접하길 권한다. 콘티 작성에 많은 도움이 된다. ‘내 살아 온 인생을 책으로 쓰면 몇 권은 될 거여.’라고 어르신들이 이야기하곤 하는데 맞는 말이다.

만화의 소재를 먼 곳에서 찾지 말 것. 개인의 삶도 역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첫사랑, 군대, 취업, 육아일기 등등 우리 모두는 이미 자기만의 훌륭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 내게 만화가냐고 물으면 손사래를 친다. 여전히 월급에 목매는 샐러리맨이고, 내 어린 시절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요즘은 웹툰 원작의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웹툰 작가 역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요즘은 웹툰 원작의 영화, 드라마가 붐이고, 작가 역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지만, 출판만화 세대인 내가 지켜야 할 영역은 따로 있다고 본다. 누군가는 오늘도 그 힘든 작업을 계속하고 있고, 그 속에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오영진 차장 은 <남쪽손님: 보통시민 오씨의 548일 북한체류기>, <평양 프로젝트> 등으로 널리 알려진 만화가다. 2003년에는 SICAF 코믹 어워드 특별상을, 2004년에는 대한민국 만화대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남쪽손님>으로 한국인 최초 프랑스 만화비평가기자협회(ACBD) 아시아만화상을 수상했다. ACBD 아시아만화상은 최근 1년간 프랑스어로 출간된 아시아권 만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에 주는 상으로 2007년 제정됐으며, 2008년 제2회 때 오영진 작가가 한국 작가 최초로 수상했다.

오영진 차장이 추천하는 만화


아트 슈피겔만

2차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다룬 작품으로 만화 최초 퓰리처상을 수상한 명작.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킴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시절을 살며 세상을 고발해 온 아버지의 삶을 아들이 가슴 먹먹하게 그려냈다.

나쁜 친구
앙꼬

순탄치 않은 학창시절을 담담하게 풀어낸 자전적 만화인데 큰 여운을 남긴다.

십팔사략
고우영

복잡한 중국사를 명쾌하게 풀어냈다. 역시 고우영다운 작품.

슬램덩크
이노우에 다케히코

학창 시절 만화를 그릴 때 이 작가의 작품을 보고 많이 좌절했다. 이 작가는 천재야!

개를 기르다
다나구치 지로

반려견의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그린 단편 만화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