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권순목 환경관(주 벨기에유럽연합대사관 겸 나토대표부)
유럽연합은 새로운 성장의 레버리지를 기후변화 대응 정책에서 찾고 있다. 2019년 폰 데어 라이엔 EU집행위원장(국가원수급)은 취임 후 11일 만에 유럽의 새로운 성장전략으로서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 정책을 발표했다.
‘기후변화 대응’, 구체적으로는 2050년 기후중립이라는 미래지향적 기준을 확립하고, 새로운 기준을 기존 산업에 접목하여 경제의 친환경 전환을 가속한다. 충분한 자금과 제도적인
뒷받침을 통해 유럽 경제구조를 지속가능하고 경쟁력 있게 전환하는 그림이다.
우선, 온실가스 배출권을 판매하여 2030년까지 100억 유로 규모의 혁신기금(Innovation Fund)을 조성하고, 이를 상용화 가능성이 큰 대규모 녹색 프로젝트에 집중하여
투자함으로써 한발 빠르게 녹색시장을 선점하는 전략을 추진하고자 한다. 또 배출권 판매를 통해 2030년까지 480억 유로의 현대화 기금(Modernization Fund)을 조성해
체코,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10개 저소득 회원국의 에너지시스템 현대화를 지원 중이다. 심지어, 공정경쟁을 명분으로 엄격하게 관리해 오던 보조금 정책에 대해서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지급기준을 완화하고 있다.
2023년 2월 EU집행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러시아발 에너지위기 극복과 빠른 녹색전환을 위해 보조금 심사 절차를 간소화하고, 복수 회원국이 함께 참여하는 대규모 친환경 프로젝트에
과감하게 재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EU는 제도 정비에도 적극적이다. 기존 제도만으로는 혁신적인 기술을 지원하거나 화석연료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 어렵다. 이에 새로운 제도를 통해 친환경 성장을 뒷받침하겠다는
것이다. 인건비가 저렴하고 환경비용도 크게 부담하지 않는 후발국 기업들과의 경쟁이 어려워진 만큼, 자신들만의 새로운 제도를 수립해 공정한 경쟁 여건을 조성하고, EU시장
내에서만큼은 EU기업들의 경쟁력을 담보하겠다는 목적도 강하다.
EU집행위원회가 2021년 7월 발표한 ‘Fit for 55 법률안 패키지’에도 같은 목적의 법안이 상당수 있다. 그중에서도 탄소국경조정제도(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CBAM)가 대표적이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다른 나라에서 생산 과정상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한 특정 제품이 ‘국경’을 넘어 EU로 수입될
때, 가격을 ‘조정’하겠다는 제도로서, 약 2년간의 논의를 거쳐 금년 5월 17일 발효되었다. EU 집행위원회는 생산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기, 수소 6개 품목과 이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몇 가지 전구물질(precursors), 역시 이들의 제조 과정에서 사용되는 에너지(간접배출) 등을 CBAM의 대상품목으로
선정했다.
철 1톤을 만드는데 이산화탄소가 1.5~3톤이 배출되며, 알루미늄, 시멘트와 같은 산업도 제조 과정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만만치 않다. 전기와 수소 역시 만드는 방법에 따라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대상품목에 포함되었다. CBAM이 얘기하는 ‘조정’은 탄소가격이 높은 EU시장에 제품을 수출하는 역외 기업은 EU 기업만큼 높은 탄소비용을
(추가로) 부담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EU당국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해외기업과 EU기업 간 공정경쟁환경(Level Playing Field)을 조성해서 (해외기업의
EU시장 내 경쟁력을 낮춤으로써) EU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의도이다.
EU기업이 이산화탄소 비용 회피를 위해 개도국에 투자해서 공장을 짓고 EU 내 공장이 생산을 중단한다면, EU의 경제적 타격이 크기 때문이다. 2019년 수입액 기준으로 러시아,
터키, 중국, 영국, 우크라이나, 대한민국, 인도 순서로 탄소집약도가 높은 CBAM 대상 제품을 EU에 많이 수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2021년 對 EU 철강 수출이 43억
USD, 알루미늄 수출이 5억 USD 수준이기 때문에, 우리 기업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이 있고, 우리나라 정부와 관련 업계도 CBAM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EU 측과 대화를
이어오고 있다.
유럽연합이 입법 중인 법안에는 탄소국경조정제도와 비슷한 성격의 법안들이 더 있다. 공급망실사법, 친환경배터리법 등에서는 유럽연합의 시장 규모와 글로벌 공급망을 레버리지로 후발
국가들에 환경이나 기후 문제, 더 나아가 인권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기업 활동을 할 것을 요구한다.
2022년 2월 EU집행위가 제안한 공급망실사법안은 유럽연합시장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이 인권과 환경 등의 가치에 부합하는 경영 기준을 세우고, 점검하고, 관련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친환경배터리법안 또한 원자재 수급, 제조, 재활용 등 가치사슬 전체에서 탄소발자국을 점검하고, 재활용 원자재 사용을 의무화하는 등 지속가능한 배터리산업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유럽연합시장에 진입하는 제품에 대해 새로운 환경규제를 도입하고 이를 유럽연합에 수출하는 국가나 기업이 제대로 이행하는지 점검해서 유럽연합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하기
점점 까다롭게 만들겠다는 셈법이다.
자신 있고 익숙한 기준(rule)을 향후 새로운 표준으로 제시하고, 본인들이 가장 앞에서 달려 나가겠다는 EU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기후·환경을 명분으로 EU 내 기업들에
보조금을 지급해 초기 상용화 단계의 위험을 대폭 줄인다. 또 저소득층이나 오래된 건물이 에너지효율을 높이는데 필요한 인프라를 개선하는 것을 보조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개도국에
익숙하지 않은 혁신적인 친환경 기술을 제시하는 일련의 정책들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인권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 값싸게 생산한 제품들이 유럽연합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는 주장. 그리고 지속가능한 질서를 무시하는 국가들이 세계 경제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대를 만족시키면서 유럽의 일자리를 지키고 투자를 늘려 새로운 경제성장의 발판을 만들겠다는 계산도 녹아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과 정치적 지지가 높은 만큼 당분간 EU의 기후변화 대응 정책은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온실가스 감축, 재생에너지 보급 등의 분야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완전한 성공을 위해 해결하고 가야 할 몇 가지 현실적 숙제들도 남아 있다.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기후변화 대응보다는 당장 서유럽 국가들만큼 잘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