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근 인천본부 제물포지사장
오랜만에 공연을 관람했다. 연극으로는 긴 5시간의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잠들어 있던 예술혼이 꿈틀거렸다. 진한 커피 두 잔을 연거푸 마신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리고 술을 한잔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마음이 설레었다.
문화예술과의 인연은 2009년 한전아트센터 공연장의 책임자로 부임하고부터다. 비전문가가 운영책임을 맡아 공연장을 망친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다. 공연을 알아야 했기에 많이 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주중에 3~4편, 주말에는 대학로 공연장을 찾아 낮 공연과 저녁 공연 2편을 보고는 했다. 관람한 공연은 꼭 프로그램북을 구입하고 후기를 기록했다. 공연 서적은 물론, 공연 주요 신문 기사는 스크랩을 했다. 6개월 과정의 공연기획자양성과정도 수료했다. 온통 공연만 생각하는 그야말로 공연에 미쳐 지내던 시절이었다. 차츰 공연 현장이나 실무적인 것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갈 무렵 좀 더 심도 있는 학문적 욕구에 대한 갈망으로 고민하다 40대 중반에 늦깎이 학생이 되어 예술학석사 학위도 취득했다.
예술인 패스
한전아트센터 근무 시절 연말 공연으로 대관한 뮤지컬 <시카고>의 공연을 취소하겠다는 기획사의 연락을 받았다. 해외 오리지널 제작자 측에서 극장 좌석수가 적어 반대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대관작품 변경을 승인 해줄테니 ‘신시컴퍼니’ 작품 라인업 중 뮤지컬 <헤어스프레이>나 <키스 미 케이트> 공연으로 대체 할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올리게
된 작품이 뮤지컬 <헤어스프레이>다.
뮤지컬 첫 출연인 박경림은 연예계 마당발답게 본인 출연 분 전회를 매진시키는 엄청난 인맥과 인기를 과시했다. 싸이, 김장훈, 박수홍 등의 유명 연예인들이 응원을 위해 공연장을
찾았고, 오세훈 서울시장도 공연을 관람했다. 신나는 음악과 경쾌한 댄스, 다양한 볼거리와 웃음, 감동으로 큰 흥행을 거두었다.
모 일간지의 “박경림의 <헤어스프레이> ‘한전아트센터’ 저주 풀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접하고 감격의 눈물을 한참이나 흘렸다. 한전아트센터에서 공연 올리면 망한다는 공연계
소문 때문에 흥행 공연 한편이 너무나도 절실했기에 그 감동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선배와 동기가 연출하는 몇 작품에 스태프로 참여했다. 협력연출, 제작감독, 예술감독 등의 직책이었다. 당연히 무보수였고, 배우 스태프 술값도 내 개인 돈으로 많이 부담했다. 공연 투자금 명목으로 적잖은 금액을 투자했으나 투자 수익은커녕 원금의 일부도 회수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공연 무대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열연한 여주인공이 뒤풀이 허름한 식당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족발을 썰고 있는 부조리. 한 작품이 끝나면 밀린 공연장 대관료에 배우들 출연료를 지급하지 못해 일정 기간 잠적해야만 하는 연출자의 비애를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듯 내 꿈도 계속 바뀐다. 공연계 입문 전에는 보통의 남자들처럼 은퇴 후 전원주택에 텃밭 가꾸며 유유자적 사는 것이었다. 공연에 미쳐 지내던 시절에는 소극장 운영하면서 지인들 초대해 공연 관람하고, 직접 담근 막걸리와 김치전 대접하는 허황된 꿈을 꾼 적도 있었다. 이제는 한 달에 2~3회 공연을 관람하고 커튼콜 때 고생한 배우들 기(氣)살린다고 앙코르를 목이 쉬도록 외치고 음악에 맞춰 춤도 추는 극성스러운 중년 아저씨를 꿈꾼다. 또 백발에 하얀수염, 모시적삼에 두루마기는 아니라도 개량한복에 중절모, 명아주 수제 지팡이 짚고 공연 보러 가는 우아한 할아버지를 꿈꾼다.
2009년 연극 <염쟁이 유氏>를 처음 관람하고 공연장에서 구입한 삼베로 만든 손수건을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다. 그 손수건에 새겨진 대사의 한 구절이 늘 나를 깨운다.
“공들여 쌓은 탑도 언젠가는 무너지지만, 끝까지 허물어지지 않는 건 그 탑을 쌓으면서 바친 정성이여. 산다는 건 누구에겐가 정성을 쏟는 게지. 죽은 사람 때문에 우는 것도
중요허지만 산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더 귀한게여. 삶이 차곡차곡 쌓여서 죽음이 되는 것처럼 모든 변화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보태져서 이루어지는 벱이여. 죽는 것 무서워들
말어. 잘 사는 게 더 어렵고 힘들어”.
연극 <염쟁이 유氏> 중 염쟁이 유 씨 대사
커튼콜을 즐기자
요즘은 전통적 커튼콜에서 많이 진화했다. 공연 내용과 연결된 내용을 커튼콜 시간에 공연하기도 하고, 주제를 담은 뮤지컬 넘버를 주인공이 다시 부르거나, 댄스타임을 도입하여 관객들의
흥을 돋우는 등 다양한 커튼콜로 관객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가끔은 혼자서 공연을 관람해보자
동행한 옆 사람 반응 신경 쓸 필요 없이 오롯이 나만의 시선으로 공연을 보자. 2층의 가장 뒤에 위치한 구석 자리는 강력 추천. 주연배우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조연들의
움직임과 열연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좋은 공연은 여러 번 관람해보자
때론 한 공연에 매료되어 여러 번 관람하는 다람족도 되어보자. 공연제작자를 살리고 배우들에게는 무대에서 열연할 수 있는 원천이 된다. 우리나라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뿌듯함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