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기태 세명대학교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교수
언제부턴가 ‘콘텐츠(contents)’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국가기관에서 대학전공의 명칭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이는 단어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 즉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맞이하여 가장 각광받는 단어로 떠오르고 있다. 그리하여 말뜻 그대로 비어 있는 ‘내용’을 채우기 위해 밤낮으로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누가 더 책을 멀리 하나 내기라도 하듯이 책과 상관없는 삶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누구도 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즐기며 게임을 하고 인터넷에 빠져 지내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책세상의 신세를 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책 속에 없는 것은 곧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책이 곧 영화이며, 드라마다. 책은 때로 연극이 되기도 하고, 책은 어느새 컴퓨터 게임의 주인공을 낳기도 한다. 책을 토대로 텔레비전은 누추한 신세를 면해 왔고, 책이 있었기에 신문은 정확한 보도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인공지능(AI)마저도 책 속의 지식과 지혜를 따라가느라 여념이 없다.
나아가 디지털 기술을 빌려 날로 진화하고 있는 책은 이른바 원소스 멀티유즈(OSMU)의 대표적인 매체로 발전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는 공연문화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작품이 명멸하는 브로드웨이 극장가를 돌아보면 그 말뜻을 실감할 수 있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극장 밀집지역에 가면 마치 ‘시간의 창고’를 거니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최첨단을 외치는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첨단관객의 입맛을 고전의 힘으로 사로잡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것은 곧 과거의 문화콘텐츠를 유물처럼 발굴해 새로운 기획 상품으로 탈바꿈시키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과거에 책을 비롯한 올드 미디어로 축적해 놓은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자산으로 뮤지컬,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캐릭터, 음반, 유튜브 영상 등 다양한 사업에서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는 원소스 멀티유즈 전략이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진단해 보자. 이미 2005년도에 세계 최대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의 주빈국으로 초청될 만큼 세계적인 출판대국으로 성장했음에도 외화내빈의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출판사에서는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급급하고 독자들은 더 이상 창출되지 않는 현실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문화유산으로서의 ‘책’에 대한 정보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은 이해하기 힘들다. 어쨌든 독자가 늘어나지 않거나 줄어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읽을 만한 환경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 종이책 중심의 사고방식만으로 읽지 않는 상황을 탓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제도가 디지털 기술이 만연한 세상에서 왜 책이 중요한지, 아니 읽기 능력이 왜 중요한지 알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는지 돌아볼 일이다. 인공지능(AI)까지 폭넓은 학습을 통해 구축한 정보를 바탕으로 사람 행세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진짜 사람들은 공부를 하지 않는 현실이 계속 이어진다면 과연 미래에 멍청해진 인간이 더욱 똑똑해지는 디지털 기술을 이길 수 있을까 염려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읽기’는 인간 완성의 중요한 조건으로 반드시 강조되어야 한다. 읽기는 사고(思考) 능력 함양을 통해 시청각(視聽覺) 활동에 매몰되어 있는 인간의 뇌를 활성화하여 세상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세상의 주인공임을 깨닫게 하고, 독서라는 간접경험을 통해 폭넓은 유대감과 새로운 세계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읽으면 행복합니다!”라는 표어 아래 “리더(reader; 읽는 사람)가 리더(leader; 지도자)로 성장하는 세상”을 꿈꿀 필요가 있다.
우리 출판계도 종이책 일변도에서 벗어나 디지털 기술과의 화해를 시도해야 한다. 화려한 장정으로 독자들에게 유혹의 눈빛을 보내는 데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과의 상생을 위한 제휴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것이 전자책(e-Book)이든 오디오북이든 상관없이 책의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올드 미디어와 뉴 미디어의 행복한 만남을 위한 책들의 변신은 아무리 지나쳐도 무죄가 아닐까. 결론적으로, 만일 누군가 새로운 미디어에 알찬 내용을 채우고 싶거든 책방을 둘러볼 일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말을 믿어볼 일이다. 수천 년에 걸쳐 인류 문명의 축적과 전승 그리고 보존의 수단으로 기능해 온 ‘책’은 바야흐로 디지털 기술로 표현되는 첨단미디어에 밀려 고리타분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지만, 책이 품고 있는 내공은 그리 호락호락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