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이유
내가 책 속을 거니는 방법 최상욱 경기본부 요금관리부 대리
내가 ‘고래’를 만난 곳
압도적인 크기의 하얀 고래가 포말 부서지는 바다 위로 뛰어오르는 장면, 최근 유행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화에 잠시 등장하는 향고래의 모습이 제가 처음 만난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소설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 삽화로 그려진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눈에 박힌 듯 떠오르는 고래의 모습이 수십 번 책을 들여다보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책의 내용이 궁금해 하나하나 읽어보게 되었고, 글자마다 새겨진 고래잡이배 선장 에이허브의 열정이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습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백경)은 읽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무엇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좋았고, 초라한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을 할 수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좁은 집안 벽면이 모두 책으로 가득 차서 작은 서점 같았던 것도 책을 읽는 데 크게 한몫한 것 같습니다. 책이 무엇을 가져다주고, 무엇이 이로워서 읽었다기보다는 그저 책이 거기 있어서 읽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성장하고부터는 책을 멀리했던 시절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도 숙제만 하다 보니 눈을 아래로 깔고만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게다가 필독서라며 강제로 읽으라고 들이밀던 것들은 얼마나 많던지요. 갑갑한 마음에 나가서 놀기만 하다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그러고 나니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가 않더라고요. 몸은 지쳤는데 머리는 말똥말똥해서 오히려 깨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명료하게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강풍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이리저리 흘러가기만 했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무 데도 아닌 곳에서 바스러지는 것처럼 느껴져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라도 남기기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문장이 떠오르지 않지 뭐예요. 아, 내가 아는 표현이 너무 적구나. 깨닫고 나니 자연스레 잠자리에 들기 전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밤에 다른 사람들의 예쁜 단어를 도둑질해다가 잘 모셔놓고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다듬는 것이 남모를 취미가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표현을 조금 바꿔서 ‘독서를 좋아한다. 쓰는 것에도 관심이 있다’고 하지만 본질은 딱 그 정도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읽기’는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평균 독서량은 갈수록 적어지고 활자는 대부분 다른 매체를 통해 접한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것들이 종이로 된 책을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종이책의 고품질화로 가격 또한 만만치가 않으니, 읽기가 쉽지 않은 시대인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읽기가 이만큼 편했던 시대도 없었으니까요. 인기 신간 도서의 대부분은 e북을 넘어 오디오북으로까지 제작됩니다. 유튜브에 책 해석은 넘쳐나고요. 결국 ‘꾸준히’가 문제인 것 같은데, 어찌 보면 그게 무슨 문제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저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접근하자면 다른 좋은 방법이 많습니다. 독서는 시간 대비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이제는 인터넷에 비해 정보의 질이 높다는 것도 통용되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훌륭한 크리에이터들도 많고 교차 검증이 쉬운 특성을 이용한 몇몇 사이트의 정보 수준은 가히 논문에 가깝습니다.

단순히 즐기는 재미 부분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게임이나 대체할 수 있는 취미가 너무도 많지요. 결국 상상력과 이해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픽이나 쉽게 바로바로 받아들여지는 영상과 달리 어떻게든 한 번 더 머릿속에 그려내고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우리는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조금 더 강한 정신적 자극이며, 시뮬레이션을 통한 경험이지요. 꾸준히 읽는 방법은 결국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을 경원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서부터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다는 것에 거리낌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것이 좋다면서요. 그러나 상상이라는 것은 새로운 세상의 창조이며 현실 세상의 재구성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양한 방향에서 삶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꾸준한 독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커피와 함께 읽을 만한, 가벼우면서 가볍지 않은 책 추천
독서의 계절에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김초엽 작가님의 책을 첫손에 꼽고 싶습니다. <므레모사>, <방금 떠나온 세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의 소설이 있습니다.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책이랍시고 어려운 책을 펼치면 잠이 솔솔 오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라,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커피 한 잔과 읽기 좋은 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초엽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세계가 1인치쯤 더 확장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강지희 평론가) 포항공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작가가 그려내는 미래상은 가히 섬세한 미래 예언서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대 딱딱하지 않고, 마구잡이식 기술적 상상에만 치우쳐 있지도 않습니다. 살아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한 번 더 내딛기 위해 복잡하고 다면적인 과학과 사회의 구조를 이용합니다. 기술 발달 과정에서 도드라지는 소외되고 배제된 소수자의 존재를 표면 위로 끌어냄으로 인간이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김초엽 작가가 논픽션 집필을 위해 공부한다는 장애학은 ‘몸의 손상이 장애를 만드는 게 아니라, 손상과 상호작용하는 사회적 구조가 장애를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과학기술과 조응하는 그 사회를 응시하게 하는 것입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로봇 다리를 달아서 걷게 된다면, 외면적으로 좋은 기술처럼 보이죠. 당사자에겐 좋은 기술일 수 있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로봇 다리를 달아서 걸을 수 있게 되니 건물이나 지형에 경사로를 설치하는 대신 장애인에게 ‘로봇 다리를 달아라.’ 사회가 이렇게 말하고 말 수도 있어요. 모두가 로봇 다리를 달 수 있는 건 아닌데 말이에요. 기술 자체로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어요. 그 기술이 위치한 사회 맥락이 중요하죠. 그걸 보여주는 게 SF라고 생각해요.”

작가의 말이 지금 당장의 현실을 예민하게 느끼는 것과 보이지 않는 머나먼 우주를 상상하는 것, 이 둘이 떨어져 있지 않은 감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와 미래를 상상하다가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책들이 한국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