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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봄은 어디쯤 와 있나요

겨울이었다. 스물여섯, 여행 가방 하나 들고 홀로 도쿄로 이민을 갔던 날도, 도쿄에서 취업 비자를 받아 잘 살다가 훌쩍 프랑스로 떠나던 날도, 그리고 이방인으로 살아온 12년의 삶을 뒤로 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던 날도 모두 코끝 시린 겨울이었다. 새해를 맞이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한 해를 보내야 할지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일지도, 혹은 그저 대담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따뜻한 봄이 오기 전, 나는 늘 새로운 변화를 도모했다. 내게 봄은 새로운 곳에서의 새출발을 의미했다. 긴 터널 같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거라는 사실에 내심 설레었으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버틸 만했다. 그래서 봄을 더욱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파리의 겨울은 유독 해가 없는, 흐린 날이 이어진다. 오죽하면 파리지앵들도 비타민 D를 챙겨 먹고 주기적으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따뜻한 옆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파리에서 해를 거듭할수록 추운 겨울에도 해가 쨍하게 뜨는 날이면 잔디밭에 누워 광합성을 하는 그들의 문화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날씨의 영향을 받아 예술가의 도시가 되었을까 싶기도 했다. 그 겨울, 일기만 쓰던 나는 글쓰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글은 차곡차곡 쌓여 ‘봄’이라는 계절에 책으로 엮어졌다. 봄은 나에게 더욱 특별한 계절이 되었다.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계절, 그 계절에 피는 꽃을 유난히 좋아한다. 또한 봄은 한 해의 시작점에 있으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기에 충분하고 최선을 다해 달릴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기라 여유가 있어 좋다.

최근 나의 찬란했던 20대와 30대가 녹아 있는 <나는 파리의 플로리스트>를 다시 읽었다. ‘나는 파리의 플로리스트’라 적어 놓고 파리의 낭만은 이야기하지 않는 책, 꽃내음이 날 것 같은 표지지만 파리의 이면을, 이방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나열한 책.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도시이자 한 번만 가지 않는다는 유럽의 보석, 파리에서 공부와 취업을 하며 이방인에서 이민자로 자리를 잡아 가는 이야기들은 다른 이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만 같아 괜히 마음을 졸이게 했다.

“행복도 기술이라는 말이 있다. 나의 행복을 잘 아는 것만큼 좋은 기술은 없다.” (<나는 파리의 플로리스트> 중) 나는 소위 낭만의 도시라 불리는 파리에살며 ‘스스로 언제, 어떻게 행복한지’에 대해 집중했다. 그 덕에 그 도시를 떠나면 없어질 것만 같은 낭만이 결국 내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겨울에도 봄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비로소 봄이 와도 그 따스함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고 내 행복을 알 기술이 없다면 그 계절은 계속 겨울이지 않을까. 최선을 다했던 시간을 ‘봄’이라고 한다면 이방인으로 살아온 12년은 모두 봄이었다. 힘들었던 순간은 추억이 되었고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들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이것은 앞으로도 내게 ‘인생의 봄’이라고 불릴 시간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신의 봄은 어디쯤 와 있나요?

이정은 플로리스트(<나는 파리의 플로리스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