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봅시다
전력망으로 읽는 국제정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슈가 전 세계를 달구고 있다. 이번 호 ‘알아봅시다’에서는 전문가 기고를 통해 우크라이나 사태를 전력망과 에너지 안보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시사점에 대해 짚어본다.
최준영,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EU와 우크라이나, 전력망으로 묶일까?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관련하여 3월 16일 유럽연합(이하 EU)은 뜻밖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그리고 우크라이나 서쪽의 몰도바 두 나라의 전력망을 유럽 대륙 전력망인 ENTSO-E(European Network of Transmission System Operators for Electricity)와 동기화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우크라이나는 EU회원국이 아니지만 전력망의 동기화가 완료되면서 최소한 전력 부문에서 우크라이나는 이제 EU 일부가 되었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이 만들어낸 예상치 못한 EU와 우크라이나 관계의 역사적인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2017년부터 러시아로부터의 전력망 분리 및 ENTSO-E와의 동기화를 추진해왔다. 2023년까지 단계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던 동기화 사업은 지난달 러시아의 침공 이후 2월 27일 우크라이나 측이 EU에 긴급하게 완료해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ENTSO-E 측이 단 2주 만에 신규 장비 설치와 테스트 수행 등 1년 치 작업을 긴박하게 진행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구소련에서 독립하였던 우크라이나와 몰도바는 독립 이후 계속 러시아가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통합 전력망의 일부였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2014년 이후 러시아와 전력 거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전력망 관리체계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번에 이를 해소한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결과와 관계없이 일단 전력 부문에서는 러시아와의 단절을 이루어냈으며, 다시는 러시아와 전력망을 연결하지 않을 것이라 밝히기도 하였다.
ENTSO-E와의 동기화를 통해 우크라이나는 단기적으로는 전력망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현재 운영 중인 석탄 화력 발전소 중 일부를 가동 중단시킴으로써 전시에 귀중한 연료를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공격으로 인한 정전 시 유럽으로부터 비상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어 사회시스템 유지에 대한 부담이 감소하였다. 장기적으로는 우크라이나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된 잉여 전력을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 수출할 수도 있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가장 큰 에너지 소비국 중 하나로서 국가 전력의 약 55%는 4개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되며, 나머지는 주로 석탄 화력 발전소가 담당하고 있다.
러시아에 전력을 의존하는 국가들, 어떻게 대처할까?
러시아로부터의 전력망 분리는 우크라이나, 몰도바 이외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도 추진하고 있다. 발트 3국은 1990년대 초반 구소련에서 독립하였고, 2004년 EU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발트 3국의 전력은 계속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 그리고 발트 3국은 그동안 BRELL(Belarus, Russia, Estonia, Latvia and Lithuania)이라는 하나의 전력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최근까지 발트 3국은 러시아와의 긴장 관계가 점차 높아지고 있었지만, 가스 및 석유와 달리 전력망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서쪽에 러시아 발트해 함대의 본거지이자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이스칸데르 미사일이 배치된 러시아 역외 영토인 칼리닌그라드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러시아가 발트 3국에 대한 전력공급을 차단할 경우 칼리닌그라드까지 정전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시 하나의 전력망으로 연결되어 있어 러시아가 자국의 막대한 피해를 무릅쓰고 전력망을 차단할 것으로는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기술 및 보안 관점에서 BRELL 분리는 시급하거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간주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EU 가입 이후 2007년 BRELL과 분리하고 유럽 ​​전력망과 동기화하려는 아이디어가 등장했으나 구체적으로 추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2018과 2019년을 전후해 러시아가 발트 3국을 BRELL에서 제외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상황은 변화하였다. 러시아는 서부 지역의 전력망을 발트 3국과 분리시키는 별도의 망 구성을 마쳤으며, 칼리닌그라드에 대해서는 전력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가스화력발전소 건립을 추진하였다. 에너지 대기업인 가스프롬(Gazprom)과 로스네프트(Rosneft)의 배당금 1000억 루블(13억 5000만 달러)을 투입하여 2020년 말 4개의 가스 화력 발전소를 완공하고 가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2019년 봄에는 라트비아에서 정전이 발생했는데 그 타이밍이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에서 핀란드와 스웨덴을 연결하는 해저 인터커넥터인 ESTLINK 가동이 중지되던 시간과 일치하여 러시아의 의도는 더욱 확실해졌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BRELL 계약 및 절차에 따라 모스크바에 자리한 통제센터에서 그리드의 안정성을 복원하는 데 필요한 예비력을 활성화하도록 지시해야 했지만, 통제센터는 정전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리투아니아는 이 사건에 대해 러시아가 발트 3국의 그리드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의도적으로 테스트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행히 정전사태는 인접국인 폴란드가 전력 공급을 확대하면서 빠르게 해소될 수 있었지만 발트3국은 BRELL에서의 빠른 분리가 필요함을 새삼스럽게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발트 3국은 본격적으로 BRELL로부터의 분리를 위해 16억 유로 규모의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유럽 ​​연합은 이 가운데 75%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현재 계획으로는 2025년까지 BRELL로부터 분리를 마무리하고, 2026년부터 EU의 전력망과 동기화되는 일정인데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더욱 빨라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드의 연결과 단절을 만드는 것
더 많은 국가들을 연결하면서 상호의존도를 높여 전쟁과 같은 충돌을 예방하고자 했던 유럽의 전력 및 에너지 정책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항상 더 넓어지고 복잡해질 것만 같던 그리드는 정치적 단층선을 따라 뚜렷하게 분리되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30년 동안 진행되던 흐름은 이제 역류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경우 슈퍼그리드의 추진에 있어 고려해야 할 요소가 더욱 많아지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경제적, 기술적 측면에 더해 국가안보라는 측면에서 그리드를 바라보고 관리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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