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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플랜맨

전동욱 마산지사 전력공급부

아무래도 저는 ‘플랜맨(Plan man)’인가 봅니다. 정재영, 한지민 주연의 영화 <플랜맨(The Plan Man)>에서 주인공 정재영은 결벽증이 있으며, 모든 일에 알람을 설정하는 계획적인 사람이에요. 영화는 흥미를 더하기 위해 과장이 심하죠. 그에 비하면 저는 그저 남들과 비교해 볼 때, 조금 더 꼼꼼하게 준비를 할 뿐이죠. 그렇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원인은 혈액형이 아닌가 합니다. 보통 A형은 소심하고, 꼼꼼한 성격에 시간 개념이 있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보통이 아니에요. Rh-A형이니까 아무래도 보통 A형에서 좀 더 왼쪽으로 간 경우이죠.
한 번은 2박 3일 경주 여행을 다녀왔어요. 저는 일주일 전부터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요. 우선, 경주 전역을 네이버 지도로 캡처합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갈 수 있는 음식점, 좋아할 만한 유적지, 볼거리, 숙소 등을 검색하여 표시해요. 요즘은 광고성 글이 넘쳐나기 때문에, 여러 블로그들을 꼼꼼히 교차 비교 검증해야 하죠. 이때가 제일 중요해요. 여기에 손품을 좀 들이고 각막이 뻑뻑해지는 정도는 돼야, 나중에 후회할 일이 적어요. 최종적으로 여행 일자별, 시간대별 동선과 각 지점의 주소를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면 여행 준비 끝!
여행 전날에는 아내에게 다음날 출발시간을 얘기해 주죠. 교통 상황을 고려해서 보통 일찍 나서는 편이에요. 그러나 매번 출발은 30분 정도 늦어져요. 출발이 늦어질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해요. 모든 일정이 뒤로 밀리는 것이죠. 꼭 이런 날 고속도로는 막힙니다. “30분 딱 일찍 출발하면 안 막히고 편안히 갈 것을, 그거 하나 시간 못 맞춰서 차 막히고, 다 늦어지고, 이기 머꼬?” 아내와의 신경전은 시작되고 들뜬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아요. 즐거워야 할 여행의 분위기도 꼬이고, 일정도 꼬이고, 이래저래 꼬여요.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매번 그렇듯 살며시 아내의 손을 포개며 화해를 시도해요. 이때는 무조건 엎드려야 해요. 아내의 일장 훈시 후, 분위기는 다시 살아나요.
중간중간 아이들은 차창 밖을 가리키며 “아빠! 저기 신기해 보여요. 가보고 싶어요.”, “아빠! 저거 먹고 싶어요”를 외쳐요. 하지만 전 준비된 일정을 위해 “안 돼! 더 재미있는 곳으로 가고 있어.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아봐! 아빠가 더 맛있는데 데리고 갈게”라며 타이르죠. 시무룩한 아이들을 애써 외면하고 바쁘게 계획된 일정을 소화해요. 숙소로 돌아와서는 애들을 재우고, 내일 일정을 확인해요.
우연히 접한 영화 <플랜맨>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저런 준비들이 가족들과의 여행을 더 재미있고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라 생각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계획되지 않은 낯선 사람들이나 공간을 마주하는 그 불안감이 더 컸었나 봐요. 영화에서 주인공은 알람시계를 버림으로써 삶을 조금씩 변화시킵니다. 확신하건대 주인공에게 생겨난 의지의 반은 한지민이었고, 당연히 제 의지의 반은 아내입니다.
저도 알람시계를 한번 버려보기로 했어요. 이번 여행의 계획을 짤 때 가족을 동참시켰어요. 서로 여러 명소들과 식당을 찾아서 최종적으로 아이들이 고르게 합니다. 일정도 여유롭게 하여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나 당황스러움을 맛보기로 했어요. 출발시간도 따로 정하지 않고 준비되는 대로 출발하기로 했지요. 출발시간이 늦어지는 것이 제 마음을 여전히 조급하게 하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네요. 아무래도 아내의 손을 적어도 한 번은 잡게 될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