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HOME > Issue > 방구석 인문학

설레는 여행의 증표일까
이동의 자유 막은 ‘문서 장벽’일까

글 윤진아 참고 <여권의 발명>

여행지 공항에 내려 여권에 도장이 찍히는 순간의 설렘이란! 지금이야 코로나19 여파로 꺼낼 일이 드물게 됐지만, 해외여행에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 바로 여권이다. 여권은 자유로운 이동을 보증해 주는 서류인 동시에, 국가가 바라지 않는 사람의 출입국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인간의 보편적 권리인 이동을 규제하고 국가의 배타적 권리로 만든 이 작은 노트의 역사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여권에 깃든 ‘포섭’과 ‘배제’의 역사

여권은 소지한 사람의 국적을 증명하는 신원확인서이자, 세계의 문을 여는 합법적 이동 수단이다. 출국 전 1순위로 챙겨야 하고, 여행지에서 돈을 잃어버릴지언정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될 이 작은 ‘도장 수첩’은 단순히 안전한 여행을 보장하는 수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의 사회학자 존 토피는 저서 <여권의 발명>에서 “근대 국가가 인간의 합법적인 이동 수단을 빼앗았고, 사람들은 특정한 공간을 가로질러 이동할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말한다. 국민과 비국민 사이의 경계를 유지하고 그 차이에 대한 인식을 강제하기 위해서는 문서를 통한 신원·이동 통제가 필수적이었고, 이 과정에서 여권이 중심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국가가 ‘이동하는 개인’의 신원(identity)을 확인하고, 누가 내부자이고 외부자인지, 누가 왕래할 수 있고 누구는 불가능한지를 구분하는 증명서가 바로 여권이 된 것이다.

왜 사람은 새처럼 오갈 수 없을까?

유럽 일부 국가는 16~17세기 절대주의 시대부터 여권 통제를 시도했다. 1548년 프로이센 제국은 집시와 부랑자에게 통행증 발급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반포했고, 프랑스 루이 14세는 왕국을 떠나려는 사람은 반드시 여권을 소지하도록 했다. 오늘날처럼 여권이 국제 이동을 위한 필수 문서로 사용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인 1차 세계대전 직후였다. 전쟁이 낳은 외국인 혐오, 조국에 원한을 품을 가능성이 있는 이들에 대한 의혹과 불신은 각국에 여권 통제가 재도입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자국민과 외국인을 구별하기 위해 지문이 필요한 신분증을 발행했고, 영국은 외국인의 출입국을 금지·제한하는 법을 만들었으며, 미국은 이민 제한을 위해 ‘출신국 할당제’를 도입했다. 각 국가는 여권을 통해 국민과 비국민을 구별하고, 국가 간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시민 개개인의 이동을 추적하고, 때론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엔 여권 소지자의 생체정보를 내장한 전자여권이 확산해 현재 110여 개 국가가 전자여권을 채택하고 있다.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알려주는 ‘신원 확인의 혁명’ 덕분에 국가는 더 효율적으로 인구를 장악할 수 있게 됐다. 인류의 이동 기술은 빠르게 향상됐지만 이동 통제 시스템 역시 견고해지면서 ‘더욱 개방적인 동시에 더욱 폐쇄적인’ 국경이 생긴 것이다.

여권 있는 사람들 vs 국적 없는 사람들

근현대 국가들이 장벽을 높이 세우면서 발생한 문제가 ‘국가 없는 사람들’의 출현이다.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고, 그 여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 안에는 중요한 힘의 논리가 존재한다.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는 것은 발급 국가가 국제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임을 나타낸다. 반대로 여권이 없는 사람은 ‘국적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난민 같은 존재가 된다. 1922년 국제연맹(UN의 전신)이 러시아 난민을 위해 발급한 ‘난센 여권’, 1951년 국제법상 최초로 난민의 지위를 규정한 ‘난민 협약’ 등 초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없지 않았지만, 법적 신분을 증명할 문서가 없는 난민들이 처한 곤경을 해소하기엔 여전히 역부족이다. 지금도 ‘국적 없는’ 사람들의 이동에 대한 통제와 불법 체류에 대한 대대적 단속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도 2018년 500명이 넘는 예멘인들이 제주도로 입국해 난민 신청을 하면서 우리 사회에 큰 화두를 던진 바 있다.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감염병으로 거의 무력화되었던 여권은 최근 각국이 굳게 닫았던 빗장을 풀면서 다시금 위상이 높아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받는 지금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여권 없는 사람’, 즉 난민이 되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가 간 역학관계 속, 여권은 단순한 개인 이동의 기록이 아니다. 각국의 역사, 정치, 사회적 맥락이 깃들어있는 국가 제도의 상징물이다.

Tip.알아두면 쓸모 있는 여권 상식

세계 2위. 대한민국 여권에 매겨진 순위다. 각국 여권으로 비자 없이 몇 개의 타국에 입국할 수 있는지 순위를 매긴 ‘헨리 여권지수’(Henley Passport Index)에 따르면, 한국의 여권파워는 미국보다 앞서 세계 2위에 랭크됐다.(2021년 11월 기준) 공동 1위를 기록한 일본과 싱가포르 여권은 192개 국가를 비자 없이 여행할 수 있고, 공동 2위인 한국과 독일 여권은 190개 국가를 여행할 수 있다. 미국의 여권파워는 영국, 노르웨이와 같은 세계 7위권. 헨리 여권지수 하위권 국가의 국민들은 백신 접종을 완료하더라도 여권지수 상위권 국가에 입국할 수 없다.

대한제국 여권 ‘집조’. 인적사항, 출발지와 도착지, 발급 관계 기관들의 도장이 찍혀있다. 여러 관청이 유기적으로 출입국 제도를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