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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매듭짓기
눈부신 엔딩 크레딧

글 정여울(<마지막 왈츠>, <끝까지 쓰는 용기>저자)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올 한 해는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아름다운 매듭이란 어떤 것일까. 저마다의 한 해, 365일을 영화로 만든다면, 우리는 어떤 ‘엔딩 크레딧’을 만들 수 있을까.

지난 365일이 한 편의 영화라면

우선 각본과 연출을 과연 나 자신이 한 것일까, 질문을 던져본다. 타인의 뜻에 따라 내 삶을 좌지우지한 것은 아닐까. 타인의 의견을 반영하되, ‘내가 만들어가고 싶은 삶의 스토리’가 지닌 큰 틀을 따랐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쁠 것 같다. 공간을 정리하는 것도 어렵지만, 시간을 정리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공간은 눈으로 볼 수 있기에 무엇이 문제인지 금방 포착할 수 있지만, 시간은 기억과 해석이 필요하기에 더욱 정리하고 매듭짓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마치 시간을 공간처럼 정리하고 가꿀 수는 없을까. 달력이나 스케줄러가 미래의 시간을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이라면, 일기를 비롯한 각종 날짜별 글쓰기는 과거를 정리하고 매듭짓기에 좋은 방법이다. 내가 권하는 아름다운 매듭짓기의 방법은 바로 ‘감사일기’를 쓰는 것이다. 하루하루 ‘오늘 나를 행복하게 한 사람들, 나에게 벌어진 사건 중 감사한 일’을 정리하다 보면, 평범했던 365일이 그 어느 날 하나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일기가 부담스럽다면 ‘한 해를 정리하는 감사의 편지’를 써보는 것도 좋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마음 전하기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지난 10년 동안 한결같이 복도와 계단을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계시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갑게 인사한다. 언제나 나뭇잎 하나, 전단지 스티커 하나 남김없이 깔끔한 복도와 계단을 바라보면, ‘저분처럼 나 또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단지 직업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일을 정말로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분을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어쩌다 복도나 계단이 조금이라도 어지럽혀져 있으면, 내가 얼른 치우게 된다. 혹시 아주머니가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지는 것이다. 며칠 뒤에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다시 나타난 그분을 보면, 그제야 안심이 된다. 미주알고주알 안부를 물어보면 곤란해하실까 봐, 그저 담백하게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시지요?” “잠깐 몸살을 앓았는데, 이젠 가뿐해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항상 나의 수줍은 인사보다 더 길고 다정하게 대답해 주실 때마다 마음이 따스해진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내 집 앞은 항상 깨끗하고, 저녁에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내 집 앞은 가지런히 청소가 되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내 삶은 축복받은 것임을 가르쳐주신 그분께 올해는 꼭 감사편지를 드려야겠다. 내 인생의 주연은 ‘나’이겠지만,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아늑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분들은 수없이 많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지 않는 곳, 누구도 소리 내어 칭찬해 주지 않는 곳이야말로 우리가 감사편지를 보내야 할 아름다운 장소가 아닐까.

‘내안의 나’에게도 안부 묻기

나 자신에게도 연말에는 감사편지를 보내고 싶어진다.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다채로운 역할과 페르소나를 연기하는 우리들에게는 저마다의 ‘부캐’에게도 안부를 물어주는 것이 어떨까. 나의 주요 캐릭터는 ‘글쓰는 사람, 작가’이지만, 글쓰지 않을 때의 나는 누군가의 딸이기도 하고, 언니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고, 이모이기도 하며, 인문학강사이거나 글쓰기선생이기도 하고, 언제든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여행자이기도 하다. 어떤 친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페르소나를 보여주기도 하고, 조카들을 만날 때는 귀여움에 무력해지는 ‘조카바보’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 내 안의 조연들이 있기 때문에 평소의 나 자신의 모습을 안정감있게 유지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부캐’는 ‘여행자’다. 글을 쓰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그저 여행 그 자체를 사랑하는 여행자. 결코 어떤 글이 되지 못하더라도, 아무런 실용적인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내가 한 곳에만 붙박혀 갑갑하게 지내는 도시인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여행의 체험은 늘 소중하다. 코로나로 인해 잃어버린 나의 소중한 부캐, 유쾌한 여행자의 캐릭터를 되찾고 싶어진다. 너무 많은 책임감에 짓눌려 사는 우리들은, 잠시나마 ‘부캐’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를 구원해 온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안의 수많은 조연과 부캐에게도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성취에도 실패에도 나는 자랐다

한 해의 아름다운 매듭짓기를 위해 또 한 번 돌아봐야 할 것은 ‘성취’와 ‘실패’의 의미를 차분히 해석하는 일이다. 잘한 것에 대해서는 끝없이 다시 곱씹어 보며 행복을 느끼지만, 실수나 실패에 대해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우리 마음. 팬데믹 시대를 겪어오면서 움츠러든 현대인의 마음은 불안과 우울에 더욱 취약해지기 쉽다. 하지만 더 아름다운 매듭짓기를 위해서는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실패에 주눅 들지 않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성공은 남들에게도 잘 드러나지만 실패는 세련되게 숨길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를 자기 자신에게도 숨겨버리는 경향이 있다. 한 번도 실패 따윈 하지 않은 것처럼, 실패를 모른 척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 속에 진정한 내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에, 그 뼈아픈 실패의 그림자마저도 끌어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엔딩 크레딧’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실패한 일들이 나를 끝없이 괴롭힌다는 생각, 나는 정말 지지리도 운이 없다는 생각, 나는 왜 좋은 환경을 타고나지 못했을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비로소 ‘아름다운 감사의 말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직 눈부신 햇살을 맞이할 수 있는 아침이 남아있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 소중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매듭짓기’이며, 우리의 삶을 만드는 주연과 조연과 감독 모두를 빛내는 찬란한 엔딩 크레딧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