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기’와
역할에 대한 생각
정연주 배전운영처 배전운영실 차장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의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다음 날도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을 부정하기 위해 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 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다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나의 천직을 이유로 울지 않겠다, 라고 썼다. 일기를 쓸 때 나는 가끔 울었다.
김행숙 <문지기>
최근 종영한 드라마에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읽어준 시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를 드라마에서 처음 들었을 때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시라고 생각했지만, 계속 곱씹어 보니 남녀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회사라는 지극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회사에서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우리 모두 ‘문지기’가 아닐까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회사가 명하는 일을 하다 보면 나의 생각과 상관없이 그 역할 때문에 생기는 오해들이 서로 간에 켜켜이 쌓이기도 하죠.
지금도 그런 오해들이 쌓여만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참 불편합니다. 특히 사업소가 아닌 본사로 발령받아 일을 하다 보니, 다른 부서 다른 직군과 부딪히고 협조하고, 거절하고 다시 요청하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처음에는 제 성격상 상대방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하기란 참 힘들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하지만 거절하지 못해 저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잘 거절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즉 문지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죠.
마음속으로는 미안함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무뚝뚝함과 냉철함(?)을 견지하며 업무처리를 하려 하지요. 때때로 그 역할이 버거울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직업을 가진 탓이라고 해야겠죠.
그래도, 저의 부탁이 거부당할 때, 저의 요청에 상대방이 난색을 표할 때 섭섭함이 고개를 듭니다. 그때,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요즈음, 회사 사내 게시판 혹은 블라인드에서는 직군 간, 성별 간, 부서 간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주기적으로 올라옵니다. 상대방을 비하하고 질타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쩌면 회사 내의 역할에 대한 몰이해가 불러일으킨 사태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수행하는 대다수 문지기들은 그런 글들을 보며 허탈함을 느낄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여성 문지기로 여성 직원에 대한 비하글이 올라오면 참으로 답답한 마음을 느낍니다. 엄마로, 본사에서 근무하는 차장으로, 엄마의 유일한 딸로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한 줄 글로 그 노력이 부정당하는 것을 보며 저는 마음 한켠이 얼어버리는 듯했습니다.
가족의 가장으로, 감독자로, 사업소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사업소에서 고객들이 제일 처음 만나는 직원, 현장에서 직접 설비를 수리하는 사람으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 회사의 문지기로 살아내는 모든 직원들을 응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