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속의 태풍?!
차 한 잔이 바꾼 역사
글 정은희(차문화 연구자,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마약 김밥, 마약 떡볶이, 마약 빵 등 ‘마약’, ‘중독’이란 말이 음식의 맛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종종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친근한 음식 앞에 붙은 ‘마약’은 먹을수록 당기는 맛, 자꾸 생각나는 맛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마약류 오남용 문제가 커지고 있다니, 이런 표현들도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주제 ‘차’와 마약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이제부터 들려주겠다.
그놈의 ‘애프터눈 티’를 마시기 위해
마약(痲藥)을 한자로 풀어보면 ‘마비의 약’이란 의미다. 마약으로 인한 쾌락은 악마에게 건강과 영혼을 맞바꾼 결과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19세기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은 마약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차(茶) 수입으로 인한 무역적자를 아편의 밀수출로 만회하려는 영국의 욕심에서 비롯된 충돌이 바로 아편전쟁이다. 영국의 국민 음료가 된 중국산 차와 양귀비에서 추출한 아편이 그 원인이었다.
중국과 영국의 무역상품, 차와 아편
17세기 영국인에게 동양의 낯선 음료였던 차는 18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어느 곳에서나 즐기는 음료가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자 차는 전 계층으로 확산되면서 차의 대량소비시대를 열었다. 19세기에 이르자 영국민의 브렉퍼스트 티(breakfast tea),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애프터 디너 티(after dinner tea) 등 식사와 간식시간에 자리한 차는 삶의 동반자였다. 차 생활이 모든 계층의 관습으로 자리하며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자 안정적인 차의 공급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영국은 엄청난차수요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시 영국의 차 공급은 중국에 완전하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무역적자는 날로 커졌다. 영국은 18세기 말 매카트니(Macartney), 19세기 초 암허스트(Amherst) 사절단을 보내 동등한 무역거래, 개항장 확대 등을 요구했지만 화이·중화(華夷·中華)의식으로 가득했던 청은 영국과 조공 관계로만 생각했다. 영국 사절단의 선물은 황제에게 바치는 공물로 이해되었을 뿐이었다. 황제는 보이차, 육안차, 무이차 등의 차를 비롯한 중국의 특산품을 답례품으로 하사했다. 영국은 동등한 관계에서 무역을 바랐지만, 청은 영국과의 무역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청이 무역 확대 제안을 거절하자 절박했던 영국은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해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한 것. 중독성을 동반한 아편은 곧 중국 전체에 성행하였고, 아편 구매로 대량의 은도 유출되었다. 아편으로 인해 국민 건강에도 국가 경제에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영국은 아편을 중국에 팔고 그 수익금으로 찻값을 지불하며 대(對)중국 무역에 흑자를 기록했다.
1839년 청의 흠차대신 임칙서(林则徐)는 광동성 호문에서 서양 상인들이 보유한 아편을 몰수해 공개적으로 바닷가에서 폐기하며 대내외적으로 마약인 아편을 금지시켰음을 알렸다. 이에 영국 의회는 자유무역주의를 내세우며 청과의 전쟁을 결의한다. 보수당의 글래드스톤(Gladstone)이 반대 연설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차(茶)사랑에 빠진 영국은 9표 차로 부도덕한 전쟁에 돌입한다.
차와 아편의 충돌, 아편전쟁
전쟁은 영국의 완승으로 끝났고, 18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되었다. 남경조약으로 청은 영국에 홍콩섬을 내주었고, 5개 항구 개방, 배상금 지불 등 불평등조약을 맺게 된다. 산업혁명, 해외 확장 등으로 발전한 영국 앞에 너무도 나약했던 청은 영국을 너무도 몰랐다. 영국군은 철제 증기 군함과 대포, 로켓탄 등 막강한 최신무기로 무장한 세계 최강의 해군이었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세계의 중심국이라 자부해온 중국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며 굴욕의 시대를 맞이한다.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을 위했던 부도덕한 아편전쟁은 영국에게도 영원히 부끄러운 역사가 되었다. 이후 영국은 식민지 인도와 스리랑카에 다원을 개발하며 세계 차 산업의 흐름까지 바꾸어 놓게 된다.
세계 정치는 물론 현대인의 일상을 바꾼 차의 힘
차를 통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제공하고, 정신적 여유를 주는 것은 동서양이 다를 바 없지만, 동서양의 문화는, 연둣빛과 붉은빛으로 음용하는 찻물이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왔다. 동양에서 차는 깨달음을 위한 음료, 윤리와 절제의 차 문화로 발전하였고, 서양에서는 차를 자본주의 상품으로 인식하며 자유롭고 다양한 의사소통의 차 문화로 자리했다.
영국에 의해 자본주의 상품이 된 차는 세계화 과정에서 미국 독립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티파티’, 앞서 소개한 ‘아편전쟁’, ‘삼각무역’ 등의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의 주요 동인이 되었다. 도자산업, 해운업, 산업혁명 등에 영향을 주기도 했으며, 티가든, 티룸,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등 현대의 공간과 여가 문화를 만들며 근대적 삶도 열었다.
1997년 미국 라이프지가 새천년을 앞두고 선정한 지난 천년의 세계사적 100대 사건 중 ‘차의 유럽 전래’가 28위를 차지할 만큼 세계사에서 차의 위치는 대단하다. 21세기 차는 다양함으로, 웰니스(wellness)의 대표 음료로 세계인과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