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잘 되게 해주세요’ 시대
회복의 단초
글 박한선(신경인류학자, 정신과 전문의)
<오징어 게임>에 구현된 적자생존은 극단적인 경쟁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냥, 또 어떤 사람은 재미로, 또 어떤 사람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갈등과 혐오를 선택한다. 하지만 회복의 실마리는 그 반대, 다정함에 있을 지도 모른다.
엄혹한 자연의 법칙 - 생존경쟁
“자연의 세계는 검투사의 쇼와 같다. 생물은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벌이며, 가장 강하고 날래고 교활한 녀석이 다음 날 또 다른 싸움을 맞이할 수 있다. 관중은 굳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할 필요가 없다.
(자연의 세계에는) 자비의 가능성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 토마스 헉슬리, <Struggle for Existence: A Programme>
다윈의 불독으로 불린 토머스 헉슬리가 남긴 말이다. 새끼 얼룩말을 덮치며 포효하는 암사자, 날카로운 발톱으로 다람쥐를 낚아채는 수리부엉이.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는 시청률을 위해 일부러 자극적인 영상만 보여주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 말 그대로 ‘다큐’다. 일어나는 일을 그저 ‘기록’한 것이다. 자연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실상 모두 생존 경쟁이나 다름없다.
먹고 먹히는 경쟁만이 아니다. 붉게 핀 꽃밭. 하지만 꽃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려고 아름다운 꽃잎을 만든 것이 아니다. 주변의 경쟁자보다 더 화려한 색으로, 더 진한 향으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려는 것이다. 노래하는 산새들. 새는 인간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니다. 더 크고, 더 선명한 소리로 경쟁하는 것이다. 여름은 짧고,패배자는 사라지고, 승리자는 자손을 남긴다. 엄혹한 자연법칙이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무겁다. 이런 세상이라면 살고 싶지 않다. 끝없는 경쟁과 피 튀기는 싸움. 하지만 결국 누군가 희생되고, 버려지고, 죽는 것 아닌가? 그저 끊임없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죽고 죽이는 것이 삶의 전부라면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위대한 영혼’이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권선징악’을 외치고, 어떤 이는 ‘절대자의 심판’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인 세상에서 인간에게 작은 위안을 주는 세 가지 희망이다. 바로 인간 정신의 특별성, 인간 사회의 특별성, 그리고 신의 특별성이다.
특별한 것은 없다
거대한 자연의 원칙을 거스르는 예외적인 힘. 인류는 오랜 역사를 통해 약육강식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는 특별한 힘을 상상해왔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럽다.
먼저 인간의 정신. 우리는 인간의 지능이나 감정, 창조성, 공감 능력 등에 지나치게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인간 정신은 분명 독특한 면이 있다. 하지만 동물의 정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하긴 어렵다. 신석기 초기 인류의 약 절반은 부족 간 싸움으로 죽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매년 40만 명이 다른 이에게 살해당하는데, 전쟁 피해자는 제외한 숫자다. 그리고 80만 명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는다.
그러면 인간 사회는? 거대 사회가 등장한 것은 불과 수천 년에 불과하다. 수백 년 전만 해도 전 인류의 2/3는 사실상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살았다. 국가 혹은 UN을 통해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을까? 당장 신문의 사회면과 정치면, 국제면을 펴보자. 국가 사회를 통해 약자를 구원하고 평화를 만들자는 소망은 그저 착각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국가 사회는 사실상 보호자라기보다는 약탈자였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신이 있지 않은가? 신학적 설명은 내 능력 밖의 일이지만, 아무래도 모르겠다. 선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새끼 얼룩말을 덮치는 암사자. 분명 잔혹한 악당처럼 보인다. 하지만 먹이를 물고 돌아가는 암사자를 반기는 새끼 사자들. 다시 보니 따뜻한 모정이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암사자에게 벌을 줄지, 상을 줄지 고민스러울 것이다. 종교는 제각각 다 같이 어울려 사는 평화로운 미래를 약속한다. 그러나 대략 다섯 개의 세계 종교는 사실 수백수천의 종교가 수천 년 간 생존 경쟁을 벌인 결과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종교를 위해 내세의 안식처도 있을까?
‘다정함’이 필요한 시대
그런데 우리는 왜 따뜻함을 원하고,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일까? 우승열패의 기나긴 진화사를 겪어왔다면, 인간의 마음도 그런 환경에 알맞게 적응했어야 할 텐데 말이다. 인간은 정에 이끌리고, 약자를 가엽게 여기고, 따뜻함을 찾는 이상한 존재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동물이다. 지금까지 최소 14종의 동물을 길들였다. 단지 양식장에서 가둬 키우는 연어나닭장 속의 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나 고양이, 소나 말처럼 주인을 알아보고 의지하는 종이다. 길들임은 ‘같이 있고 싶어하는’ 마음의 상태다. 인간은 여러 종의 동물을 길들였고, 사실 우리도 그들에게 길들여졌다.
인간에게 가장 성공적으로 길들여진 동물은 무엇일까? 개? 고양이? 아니다. 바로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원하고, 인간에게 충성하고,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고, 인간 품으로 다가와 안긴다.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인간은 인간에게 ‘개’다.
나만 잘되고 싶은 세상. 남보다 앞서고 싶고, 남을 내려다보고 싶은 유아기적 소망은 공정한 경쟁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세상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학업도, 업무도, 심지어 우정이나 연애, 결혼도 다 경쟁이란다. 정말 그럴까?
현대인의 마음속 공허함이 점점 커진다. 주인의 품에 폭 안기고 싶은 강아지처럼, 우리도 다정한 이에게 안겨 따뜻함을 느끼기 원한다. 싸움과 경쟁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행복이다. 돈으로 혹은 힘으로 누군가를 내 곁에 둘 수는 있다. 그러나 뭔가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것을 곧 느낄 것이다. 오랜 길들임을 통한 따뜻함은 다른 식으로 얻을 수 없고, 강제로 빼앗을 수도 없다. 만약 인간에게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정신도, 인간 사회도, 신도 아니다. 바로 길들임을 통한 따뜻함이다.
나도 너에게 수많은 다른 여우와 다를 것 없는 한 마리 여우일 뿐이야.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거야.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