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HOME > Issue > 방구석 인문학

조선 시대에도
‘최애’와 ‘덕질’이 있었다고?!
선비들의 색다른 취미 열전

글 박수밀(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고전문학자)

“벽이 없는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다.
홀로 자기만의 세계를 개척하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종종 벽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인용은『북학의(北學議)』의 저자 박제가의 말이다. 벽(癖)은 일종의 마니아적 기질로 오늘날의 ‘덕질’과 비슷한 뜻이다. 덕후(오타쿠)는 일본에서 건너온 새로운 인간형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 시대에도 덕후들이 있었다. 18세기 후반 조선은 문화의 세기를 맞아 다양한 수집벽과 애호벽이 생겨났고 덕후들은 조선의 새로운 문화를 선도해갔다.

이옥(李鈺, 1760~1815)은 담배에 미친 사람이었다. 조선 후기엔 흡연이 크게 유행했고, 담배는 일종의 기호 식품으로 인식되어 연다(煙茶)로 불렸다. 차를 마시듯이 담배를 피운다는 뜻이다. 당시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면 마늘 냄새와 가래를 없애주고 뱃속의 회충을 제거하며 위를 편안하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담배를 피웠다.
이옥도 스스로 담배에 고질병을 앓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담배를 매일 즐겨 피울 뿐만 아니라 집에서 직접 재배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담배에 관한 책을 썼다. 조선에 담배가 들어온 지 2백 년이 지났는데도 담배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 사람들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썼노라고 고백했다. 총 4권으로 구성된 책에는 담배를 경작하는 방법과 과정, 담배를 만드는 법, 담배를 피우는데 사용하는 각종 도구, 가짜 담배를 식별하는 법, 흡연의 멋과 효용 등 담배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했다. 이옥은 책의 이름을 『연경煙經』, 곧 담배의 경전이라고 붙였다. 고전시대에 쓰인 거의 유일한 담배에 관한 저술이다. 한갓 담배라는 일상의 기호품에다 성스러운 책 이름에 붙이는 ‘경(經)’을 사용한 배짱이 발칙하기만 하다.

화가인 김덕형(金德亨)은 꽃에 미친 사람이었다. 꽃 그림 실력도 뛰어나 그림 한 폭이 완성될 때마다 사람들은 다투어 소장했고, 저명한 화가들도 귀중한 보배인 듯 여겼다. 그는 날마다 눈만 뜨면 꽃밭으로 서둘러 달려가 꽃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리곤 종일토록 꼼짝 않고 눈도 깜박하지 않는 채 꽃이 지는 모습과 꽃술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손님이 찾아와도 한마디 말도 대꾸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미쳤군!” 하고 비웃으며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꽃의 생태를 꼼꼼하게 기록하여 『백화보(百花譜)』를 펴냈다. 꽃의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꽃 그림책이었다. 박제가는 그런 그를 다음과 같이 기렸다. “저 벌벌 떨고 빌빌대며 천하의 큰일을 그르치면서도 스스로 지나친 병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이 책을 보고 경계로 삼을진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책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장기, 바둑 등의 잡기도 전혀 하지 않았고 세상 물정엔 도통 어두웠다. 책 읽기만 좋아해서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아픈 것도 잊고 오로지 책만 읽었다. 그가 어렸을 때, 하루는 집안사람들이 그가 어디로 갔는지를 몰라 난리가 났다. 저녁에야 대청 벽 뒤에 있는 풀 더미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벽에 적힌 글을 읽다가 넋이 빠져 날이 저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남몰래 벽에 해시계를 그려 놓은 후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도 일정한 시간이 되면 서재로 달려가 책을 읽었다. 여행을 갈 때도 반드시 책을 갖고 다녔으며 여관에서 묵거나 배를 타고 갈 때도 책은 반드시 들고 다녔다.
그는 서얼인 탓에 무척 가난해서 결혼해서도 작은 단칸방에서 살았다. 책을 읽고 싶었지만, 햇빛이 비치지 않아 방이 너무 어두웠다. 다행히 동쪽과 서쪽과 남쪽에 작은 창이 있어서 해가 동쪽에 뜨면 동창 아래서 책을 읽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 서창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큰 깨달음을 얻으면 벌떡 일어나 왔다 갔다 하며 깍깍 소리를 질러댔다.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는 소리를 들으면 ‘희귀한 책을 구했나 보다’ 생각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보는 미치광이라고 불렀다. 규장각의 검서관이 되어 직책을 수행할 때, 정조도 그가 책 읽는 소리를 무척 아껴 520차례에 걸쳐 하사품을 주었다. 53세에 폐렴으로 죽기까지 그는 오로지 책에 묻혀 평생을 책 속에서 살았다. 그가 평생 읽은 책은 2만 권이 넘었으며, 33책 71권 분량의 『청장관전서』를 저술했다.

정란(鄭瀾, 1725~1791)은 여행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여느 사람들과 달리 출세와 명예,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장부가 한번 태어나 사마천과 같이 천하를 유람하지는 못할지라도 조선의 명산대천을 두루 본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그는 대자연의 기운을 호흡하며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 다니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청노새 한마리와 한 명의 종, 보따리 하나와 이불 한 채만 지닌 채 홀연히 길을 떠났다. 남으로는 덕유산을 오르고 속리산을 더듬고 월출산과 지리산을 올랐다. 동쪽으로는 소백산을 구경하고 단발령을 넘어 금강산을 올랐다.
18세기 남인의 거장인 이용휴는 그런 그에 대해 “오늘 금강산이 그대를 만나자 모든 바위와 골짜기가 반가운 얼굴을 했다네. 그대를 두고 산문(山門)을 처음 연 사람이라고 해도 좋으리.”라고 추켜세웠다. 전국의 수많은 명승지를 여행하고서도 나라의 명산을 모조리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던 그는 쉰여섯의 나이에 ‘나는 아직 힘이 있다’는 말과 함께 여행객들이 최종 목표로 꼽는 백두산과 한라산을 등반했다. 백두산 유람은 일 년이 걸리는 험난한 도전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강역고(疆域考)』에서 “근래에 창해거사 정란과 진택 노인 신광하 두 사람이 백두산 정상에 올라 큰 연못을 내려다보았다.”라고 증언해주었다.
정란은 처자식마저 버리고 오로지 여행에 미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산수(山水)에 미친 고질병에 걸렸다며 “일반인과 다른 짓을 하는 놈”이라고 흉을 보고 나무랐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조선 최초의 전문 여행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이같이 18세기는 전례 없는 문화변동과 더불어 무언가에 깊이 빠진 덕후들이 넘쳐났다. 그저 생존이 아닌 ‘잘 사는 것’,
‘향유하며 사는 것’에 대한 관심이 세상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어갔다. ‘덕후’들은 기꺼이 치(痴)가 되어 기존의 낡은 가치를 허물어뜨렸다. 벽(癖)을 지닌 자들의 열정과 몰두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내고 시대의 변화를 이끄는 첨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