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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이 당연해지는 데
참 오래 걸렸다!
우리 사회를 찾아온 새로운 가치들에 대하여

글 김용섭 (트렌드 분석가,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청렴과 공정, 평등, 상생 등의 단어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 말이 당연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정, 부패, 특권, 차별을 일삼는 이들도 말을 할 때는 청렴, 공정, 평등, 상생이란 말을 자주 쓴다. ‘내로남불’이자 표리부동이다. 부끄러움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해서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아니 과거엔 더 심했다. 사회적으로 제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변화는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게 아니라, 시스템을 바꾸고 사회적 기준이 바뀌는 것에서 시작된다.

조직문화에서 확산되는 ‘뉴 노멀’의 가치들

올해 초 국내 주요 대기업을 강타한 것이 성과급의 공정성 문제다. 성과급 산정 방식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공개하고, 집행하라는 요구가 여러 기업으로 번졌고, 전에 없던 사무연구직 노조가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들이 한결같이 내세운 화두는 투명성과 공정성이다. 세상을 바꾸자는 거창한 얘기가 아니라, 잘한 사람은 성과급을 더 받고, 못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게 평가받자는 것이다. 공공의 영역에서 청렴, 공정, 평등, 상생의 가치의 중요성은 날로 커져왔다. 하지만 이 같은 가치들이 시스템에 적용되어 우리의 일터와 일상에 와닿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기업의 조직 문화에서는 부당하고 불합리한 ‘갑질’도 많았고, 군대 문화의 잔재도 많았다. 되려 문제 제기하는 이들이 불이익을 받았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게 ESG 시대가 도래한 오늘날의 숙제가 됐다. 놀랍게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점차 문제 제기가 받아들여지고 기업의 시스템 또한 바뀌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리도 당연한 요구가 기업에서 높아졌을까? 사회적 진화와 함께, 문제 제기에 대한 불이익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큰 배경이 될 것이다.

돈쭐내기, ‘공정’ 추구의 자구책

가난한 형제에게 치킨을 무료로 준 치킨집, 어려운 가족에게 피자를 무료로 선물한 피자집, 결식아동들에게 파스타를 제공하는 파스타집 등 소셜 미디어에서 ‘돈쭐내기’의 대상이 된 곳들이 점점 늘어간다. 돈쭐내기는 돈으로 혼쭐내는 것을 말한다.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우리 사회가 늘 정당한 보상을 해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착하게 살며 손해를 보는 사람에게 바보 같다고 얘기한다. 이런 사회에 공정성과 청렴문화가 건강히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돈쭐내기는 이러한 사회가 낳은 하나의 놀이문화이자 사회적 행동이다. 착하고 모범이 되는 가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들을 위해 우리가 직접 나서서 보상해 주자는 것이다. 거창하게 세상을 바꾸자는 게 아니라, 주변의 가까운 곳에서 ‘체감’가능한 변화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어떠한 가치든 구호가 아닌 일상의 행동이 되는 순간, 상식으로 자리 잡기 마련이다.
물론 이러한 ‘돈쭐내기’는 사회 시스템의 작동이 아닌, 눈에 보이는 변화를 원했던 시민들의 자구책이라는 한계가 있다.

국가 청렴도 소폭 상승, 우리 사회는 정말 나아졌을까?

국제투명성기구(TI)는 매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를 발표한다. 공공부문의 부패에 대한 평가, 즉 국가 청렴도를 알 수 있는 지수다. 2020년 기준, 한국은 총 조사대상 180개국 중 33위다. OECD 37개국 중에선 23위다. 경제력에선 10위권에 들지만 청렴도에선 다소 낮다. 그렇지만 이것도 역대 가장 높은 순위다. 100점 만점 중 우리나라는 61점*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멀었다. 우리나라가 60점대에 진입한 것도 역시 처음이다. 2004년까진 40점대였고, 지난 15년간 50점대에 계속 머물렀다. 참고로, 최고점을 기록한 나라는 덴마크, 뉴질랜드가 88점으로 공동 1위고, 핀란드, 스웨덴, 스위스가 85점으로 공동 3위다. 이들 국가와 한국의 가장 큰 차이로 꼽히는 것이 ‘특권 의식’이다. 아직도 특권 의식을 가진 이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을 주춤하게 하는 것이 시민들의 목소리일 것이다. 물론 그전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와 사회 면면의 모습들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특권 의식에 젖어 있진 않았는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부당한 것을 묵인한 적은 없었는지’.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변화하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다면 불공정과 특권 의식을 바로잡는 사회적 시스템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껏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을 이루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구호가 아닌 실행의 시대가 도래했다. 청렴과 공정도 말로만 때우지 않고, 행동으로, 시스템의 작동으로 보여져야 한다. 다행히도 사람들이 변화했고 시대도 바뀌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선진국은 경제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상식이 지켜지고, 당연한 것이 당연해질 때 비로소 진짜 ‘살만한 곳’, 선진국이 된다.

* 부패인식지수는 높을수록 ‘덜 부패하다고 인식’된다. 70점대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투명한 상태’로 볼 수 있고, 50점대는 ‘절대 부패에서 벗어난’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