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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필요한 시간

글 최원형(작가,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저자)

기후 위기에 대한 책임 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상 영위가 공존은커녕 누군가의 생명에 치명적인 해가 된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은 먹거리나 소비 생활을 바꾸고, 기업과 국가를 향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각성과 움직임은 실제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혹시 이미 늦어버린 건 아닐까?

우리를 일깨운 계절의 ‘선물’

달력을 넘기다 눈에 들어온 ‘입추’와 ‘처서’는 약간의 숨통 같은 위안이다. 그렇지만 기대는 사실상 크지 않다. 여름은 해마다 길어지고 있고 폭염에 열대야를 세트 메뉴로 끼고 살아야 하는 기후 위기의 시대 아닌가. 게다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얼굴을 반 이상 가린 채 몹시 더운 날들을 지내야 하니 이 고통은 폭염 그 이상이다. 여름은 본래 더운 계절이다. 더위 속에 곡식은 영글고 과일엔 단물이 한껏 든다. 그럼에도 이 더위가 예사롭지 않은 건 바로 일 년 전 54일 동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양 내렸던 비를, 2018년 40도 가까이 오르던 폭염을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저개발국가들이 숱하게 겪던 기후 재난이 더이상 국지적인 위기가 아님을 올해 독일, 벨기에, 캐나다, 영국 등 소위 잘사는 나라에서 증명이라도 하듯 보여줬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리턴 마을은 50도 가까이 오르는 폭염에 산불까지 발생해 마을 대부분이 잿더미가 됐다. 독일과 벨기에를 덮친 홍수로 사망자와 실종자 수가 400명에 육박했다. 영국 런던에는 한 달 치 비가 단 3시간 만에 쏟아지며 지하철역이 잠겼다. 재난의 규모도 놀랍지만, 집이 쓸려가 버리고 자동차가 종잇장 구겨지듯 다리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21세기에 그것도 잘사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이었다. 물불 가리지 않는 재난이 훑고 지나간 풍경을 보다가 사진 한 장에 눈길이 머물렀다. 홍수 피해를 입은 독일 아르바일러에 쌓인 쓰레기 더미였다. 우리 문명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사진이 아닐까 싶어 눈길을 쉽게 거둘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쓰레기 더미는 우리가 그러모으려던 욕망의 마지막 모습이 아닐지.

“How Dare You?”

오늘날 벌어지는 기후 위기의 원인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리고 그 원인이 인간 활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역시 어린아이도 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기후 위기는 날이 갈수록 더 극심해지는 걸까? 우리는 정말 원인을 아는 걸까,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마도 후자일 거라 생각한다. 원인을 알려는 노력조차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테다. 원인을 알려는 노력은 기후 위기를 진짜 위기로 인식했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 집에 불이 났는데도 불을 끌 생각은커녕 어떻게 파티를 즐길 수 있느냐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말이 작금의 사태를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불이 났다는 걸 인지한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불부터 꺼야 한다. 기후가 위기라는 인식이 정말로 절박하다면 위기의 원인인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고기를 얻으려 브라질 열대우림에 불을 지르고 대량으로 동물을 기르면서 발생시키는 온실가스로 지구가 뜨거워진다는 걸 안다면 고기 소비를 과감히 줄여야 한다. 노르웨이와 호주에서 비행기로 실어 온 연어와 소고기로 차려진 밥상이 얼마나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지 이젠 알아야 한다. 자원을 채굴하고 제조하는 과정에서 지구를 뜨겁게 만드는 스마트폰을 고작 2.7년 쓰고 버릴 게 아니라 수리해 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옷장이 터질 듯 넘쳐나는 옷을 만드느라 배출한 온실가스로 지구는 지질학적인 속도를 버리고 인간의 속도를 닮아가고 있다. 지구 전체 배출량의 고작 7퍼센트만 배출한 인구의 절반은 속절없이 홍수에 태풍에 사랑하는 가족의 손을 놓치고 굶주림 속에 놓여있다. 대체 이 광폭하고 거센 태풍을 만든 게 누구인가?

우리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할 아픈 질문들

8월은 봄에 우리나라를 찾아와 번식을 하고 새끼를 기르던 많은 새들이 떠날 채비를 하는 때이다. 막 둥지를 떠난 새들을 만날 때 반가움에 앞서 두려움이 인다. 끓어오르는 기온을 감당하지 못한 채 부리를 벌리며 힘겨워하는 새들, 그들에겐 에어컨도 폭염 피난처도 없다. 오늘날 기후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온실가스에 있지 않다. 그것은 지구에서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동시대에 고통받는 생명들의 존재를 감각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생태 감수성을 상실한 채 한껏 오만했던 호모 사피엔스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 8월 달력을 훑다가 에너지의 날을 발견했다.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의 94.7퍼센트가 에너지와 산업공정에서 발생한다. 그런 공정의 가장 끝단에 우리의 소비가 있다. 기후를 위기에 빠뜨리며 인류의 자멸을 초래하는 행위가 결국 우리가 먹고 입고 사용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 소비에서 비롯되다니. 의식주를 영위하며 살려는 행위가 자멸을 초래하는 이 아이러니라니.
이제 질문이 필요한 시간이다. 우리는 정말 지구에서 지속가능한 삶을 원하는지? 공동의 집에 붙은 불을 끌 각오는 되어 있는지? 그렇다면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이 폭염에 우리 얼굴의 이 마스크는 대체 누가 씌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