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HOME > Theme > Culture

지식 프로그램,
공부의 즐거움을 빼앗긴
어른들의 나머지 공부

글 이승한(TV 칼럼니스트)

매주 한국인들은 TV 앞에서 공부를 한다. EBS도 OUN도 아닌 KBS가, 상업방송 SBS가, 엔터테인먼트 채널 tvN이, 종합편성채널 JTBC가 자꾸만 묵직한 양의 지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공부라면 초·중·고등학교 12년 동안 세계 최고 수준으로 혹사당하느라 질릴 만큼 질린 어른들이, 왜 이런 프로그램들에 열광하고 있는 걸까?

일찌감치 ‘공부’에 질리는 한국인들

공부, 하기 싫다. 그렇지 않나? 한국 학생들은 정말 목구멍으로 신물이 넘어올 때까지 공부한다. 2009년 OECD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은 주당 49.43시간 공부했다. 같은 조사에서 OECD 국가 평균은 33.92시간이었다. 공부를 잘해야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대학을 가야 좋은 직장을 잡고, 좋은 직장을 잡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배웠으니까. 덕분에 2018년 OECD 국제학업성취도 평가(PISA)에 참가한 한국의 15세 학생들은 OECD 37개국 중 읽기 2~7위, 수학 1~4위, 과학 3~5위를 기록했다.
그런데 그렇게 이 악물고 공부한 끝에 사회에 나오는 순간, 한국인의 학습 의욕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OECD 국제성인역량평가(PIAAC)에서 한국이 거둔 성적은 초라하다. 한국인의 학습 역량은 16세~24세 연령구간에서는 OECD 평균보다 크게 높게 나오다가, 25세~34세에서 서서히 하락해서, 35세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OECD 평균을 갉아먹는다. 당연한 결과다. 공부를 남들보다 훨씬 더 질리게 시켜댔으니, 남들보다 일찍 질릴 수밖에. 더는 공부를 안 해도 되는 나이가 되는 순간 한국인은 공부를 놓는다.

학교에서 잊어버린 ‘공부하는 즐거움’, TV 앞에서 되찾다

그런데 우리, 정말 공부 싫어하던가? ‘공부’라는 표현만 쓰지 않는다면, 우린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익히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다. 그게 아닌 이상, TV가 이처럼 발 벗고 나서서 지식 콘텐츠를 선보일 리가 없다. TV는 책을 추천해주고(KBS <북유럽>),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했던 순간들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며(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심리학자, 과학자, 법학가 등의 전문가들을 모아 놓고 범죄의 역사에 관한 고찰을 들려준다(tvN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들을, 한국인은 꽤나 열정적으로 본다. 어라, 우리 공부 좋아했네?
TV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려는 한국인의 열망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흔히들 그 기점을 2017년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열풍으로 잡지만, 따지고 보면 그 연원이 제법 길다. 2009년 특강 열풍을 주도한 ‘라이프 코치’ 김미경 강사의 스피치 특강 시리즈부터, 넉넉하게는 EBS 기획특강 <도올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1999), 더 멀게 보면 90년대 초반 KBS <아침마당>을 통해 선보였던 이시형 박사의 자녀교육론과 부부론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혹자는 이처럼 지식을 다루는 TV 프로그램들의 흥행을 짚으며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생존경쟁을 펼쳐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스펙으로서의 인문학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강박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분석하지만, 꼭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알쓸범잡>이나 <꼬꼬무>가 소개하는 지식이 인사고과나 이직에 도움이 될 만한 지식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지 않은가?
지식 프로그램의 흥행은 오히려 한국인의 마음속에 언제나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빼앗긴 ‘공부의 즐거움’을 되찾고 싶은 욕망,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욕망이 남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에 가깝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삶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커브볼을 던진다. 코피가 터져가며 외웠던 것들은 학력고사가, 수능이, 졸업논문 작성이 끝남과 동시에 휘발되고, 그나마 남아있는 ‘학교 공부’의 결과물들은 실제 우리 삶의 여러 고민과 질문들을 해결하는 데엔 큰 도움이 안 된다. 그러니, 친근한 얼굴을 한 TV가 웃음기를 한껏 섞어 들려주는 지식을 접하며 위안을 얻고,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는 즐거움, 그러니까 공부의 즐거움을 다시 찾는 것이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TV 앞으로 가는 우린,
어쩌면 모두 학생인지도 몰라

실제로 한국 사람들은 세상이 급격히 변할 때마다 학교가 가르쳐 주지 않던 지식을 TV에서 찾았다. 소련 붕괴(1991)로 세계 냉전 질서가 무너질 때 이시형 박사의 자녀교육론과 부부론을 보며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족을 챙기는 법을 고민했고, 아시아 외환위기(1997)로 삶의 기반이 흔들릴 때 도올의 노자 강의를 들으며 삶의 근본적인 방향을 모색했다. 미국발 세계금융위기(2008)로 전 세계가 술렁일 때 김미경의 스피치 강의를 들으며 자신감을 찾는 법을 생각했으며,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2017)이 이뤄졌을 때 <알쓸신잡>이나 <차이나는 클라스>(JTBC, 2017~ )을 보면서 역사 속에서 정치적 혼란을 통과할 실마리를 찾았다.
코로나19 팬데믹(2020~ )으로 한 치 앞을 예상 못할 어둠 속을 헤매는 오늘의 우리가 <북유럽>, <알쓸범잡>, <꼬꼬무>, <차이나는 클라스> 등의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것도 사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그 시기를 헤쳐나갈 지식을 배우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학교에서 공부의 즐거움을 빼앗긴 우리는, 어쩌면 TV가 제공하는 즐거움의 힘에 기대어 밀린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