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HOME > Theme > Trend

‘셀프 부양’의 시대 도래하다

글 김민섭(작가, <경계인의 시선> 저자)

몇 년 전부터 ‘각자도생’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트렌드가 되었다. 유명 트렌드 서적은 물론, 여러 매체에서 이 현상을 다뤘다. 이러한 트렌드 키워드는 대개 몇 년 지나고 나면 현실과는 괴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각자도생은 지금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는 한편 여러 갈래로 확장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가족 구성원들조차도 각자의 자립을 도모해야 할 때가 왔다. 이른바 ‘셀프 부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공동체의 의미

사실 각자도생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우리 앞에 당면했던 거대한 재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세월호를 호출해야만 하는데, 우리는 세월호가 가라앉는 장면을 생중계로 목도해야 했다. 국가가 구조한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도 불구하고 배 위로 올라온 일부의 승객뿐이었다. 그 말에 순응했던 10대들은 거의 빠져나오지 못했다. 정치적인 쟁점을 모두 떠나서, 그건 모두에게 각자도생의 감각을 불어넣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0대와 20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국가, 사회, 기성세대,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고 믿게 되었다. 내가 만나본 90년대생들은 대개 세월호라는 재난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재난에 이르러서도 그렇다. 국가는 백신을 개발하는 데 실패했고 충분한 양의 백신을 확보하는 데도 실패했다. 한국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는 하지만, 마스크를 잘 쓰는 것은 사실 각자도생의 영역이다.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아 확진자가 늘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마스크를 더욱 단단히 썼다. 그러면서 생존을 위해 믿을 것은 오직 나뿐이라고 믿게 되었다. 공동체라는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낮아진 듯하다.

가족 가치관, 변화하다

각자가 알아서 생존해야 한다는 감각은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원래 부양은 노동하는 가장의 몫이었다. 그가 자녀와 부모를 함께 부양했고 은퇴하고 나면 자신이 돌보아온 자녀에게 그도 부양 받았다. 그게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2030세대는 누구도 부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듯하다. 그건 전 세계 출산율 최하위라는 기록에서도 잘 나타난다. 2020년 한국의 출산율은 0.84%였다. 자신들을 ‘누군가를 부양할 수 없는 개인’으로 규정한 그들은 출산뿐 아니라 부모를 부양하는 것 역시 포기하기에 이른다. 반면 5060세대는 그러한 과도기의 ‘낀 세대’가 되었다. 부모와 성인 자녀에 대한 부양뿐 아니라 손주에 대한 부양까지 도우면서도 본인들의 노후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1998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부모 부양에 대한 책임’이 ‘가족’에 있다는 응답은 전체의 89.9%에 달했다. 최근의 조사 결과는 30%로 20년 새 부모 부양 책임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자립’의 새 의미

실제로도 부양을 전제로 유지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많이 해체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부모도 자식도 별로 가진 것 없이 셀프 부양을 해야 할 처지에 내몰리게 되었고, 그로 인한 갈등 역시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특별히 조금 더 이기적인 개인들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구조 안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부모 세대가 정규직, 월급, 저축, 내 집 등의 단어에 익숙했다면, 자녀 세대는 비정규직, 인턴, 대출, 월세 등의 단어에 익숙하다. 결국 이 갈등은 온전히 개인들이 짊어질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 한 개인을 부양할 책임은 그와 그 가족뿐 아니라 국가에도 있다.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는 이들을 살피고 그들을 위한 안전망을 더욱 확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독립적인 가족 구성원의 탄생이 가족이라는 집단의 정서적 해체로까지 이어져서는 안 된다. 부양받을 수 없게 된 상실감만큼이나 부양할 수 없게 된 상실감 역시 크다. 서로의 처지와 마음을 돌보는 가운데 가족이라는 가치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 여덟 살 된 아이에게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자기 일은 자기가 스스로.”라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나의 물건을 숨겨 두고는 “자기 물건은 자기가 스스로 (지켜야 해)”라고 말한다. 내가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언제까지 잘 돌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가능하다면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잘 부양하고 싶다. 그리고 그가 노동할 나이가 되었을 때, 서로를 걱정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셀프 부양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